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한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연해에는 서양 선박들이 포착하거나 접근하여 와 한국인들의 두려움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함락 소식은 동일한 문화권인 우리 나라에도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2. 러일 전쟁이 조선에 미친 영향
러일전쟁의 결과는 포츠머스 강화회담과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한국은 주권을 일본에 거의 빼앗기
일본은 아산 풍도 앞바다에서 청의 해군을 공격하고 청일전쟁 발발. 결국에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끝으로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파기, 랴오뚱 반도, 타이완,
평후섬 할양, 배상금 지불, 서양열강과 동일한 특권을 보장 받는 조약을 체결
3. 대체 역사의 구성
청일전쟁
- 청나라는 전쟁의
일본군은 승무원들을 구조하였다. 가오슝호의 침몰은 일본과 영군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 법으로 처리되었다.
(2)- 2. 성환과 평양의 전투
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4,000명의 일본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는데 두려움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실시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고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보고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을 조선에서 몰아낼 생각을 한다.
(6). 1895년 을미사변 : 러시아가 조선에 대한 세
조선출동 통고를 받자마자 곧 조선에 침입한다.
한편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영토분할을 주도하고 있던 영국은 당시 제정 러시아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로 보고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동맹세력을 찾고 있었고,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던 일본을 장래의 동맹국으로 보고 청일전쟁
개혁에도 많은 힘을 기울인 최초의 근대적 정치단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창설 된지 단 2년 만에 독립협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한다는 국왕의 측근세력의 모함에 휘말려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결국 해산에 이르고 만다.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개혁안보다 한층 적극화했고 토지문제에 있어서도 개화당보다 실학자의 개혁안을 이어받아 농민적 소유를 주장했다가 결국 균등한 경영, 즉 분작을 제시하였다.
이 밖에도 개항 전 민란 때부터 농민이 주장해오던 3정의 문란에 대한 시정 요구가 강력히 주장되었다. 갑신정변 세력의 개혁 정책 등이
대한으로 개정하여 내외에 선포한다. 그 결과 마침내 대한제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성립된 대한제국정부는 '옛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의 원칙을 세워 개혁을 펼쳐 나간다. 일본에 기대어 개혁을 급격하게 단행한 갑오적원의 방식을 반성하고, 주체적으로 서양의 법
청은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이홍장의 북양육군 3000명을 서울과 근교에 파견, 점령하고 곧 이어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간다. 이후 청은 조선에 중극 은 50만 냥을 제공함과 동시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1882)을 체결한다.
이 장정은 일종의 청국과 조선간의 조약인데, 조약(條約)이